행복합니다.
근데 복귀가 코앞입니다.
진짜 1.2초입니다.
커헉...
- 2011/02/08 21:01
- Laridae.egloos.com/3569836
- 덧글수 : 2
프로야구 30년사에서 각각의 기록들에 아로새겨진 이름들을 보면 참으로 경이롭다. 그만큼 한국야구가 성장했고, 성숙했으며, 풍성해졌다는 것일 것. 한 시즌 80경기에서 시작해서 133경기로, 6팀에서 시작해서 8팀으로, 그리고 제 9구단, 제 10구단 논의도 이어지는 것은, 이런 기록의 쌓임이 지속적으로 풍성함을 더할 것임을 나타내준다. 물론, 점점 더 선수들에 대한 관리가 체계적이게 되고, 기술들이 증가하며, 그렇게 선수생활 기간도 더 길어지게 되면서 상대적으로 이른 시기에 선수생활을 했던 선수들은 기록지의 상위랭크에서 사라질 수도 있다. 그렇게 되면 후대에는 기억에서 그 이름조차 희미해지리라. 한국야구의 발전이라는 면에서는 기쁜 일이지만, 기억과 기록 사이의 간극을 생각하면 안타까워진다.
(2번째 '2000안타'의 기록을 달성한 이후 전준호. 그의 이름은 프로야구사에 영원히 남을 것이다.)
그러나 몇몇 선수들은, 100년이 지나도 기록지 위 상위권에 랭크 되어있을 있을 것이다. 기록이 있으면 기억하기도 싶다. 그렇게 그들의 이름은 미래의 한국프로야구에서도 기억에 깊이 새겨져 있을 것이다. 타격 부문에서 대부분의 통산 1위 기록을 지닌 양준혁이나, 투수 부문에서 대부분의 통산 1위 기록을 지닌 송진우, 100승 200세이브의, 한미일 프로야구를 통틀어서도 흔치 않은 기록을 지니고 있는 노송 김용수. 더불어서 550도루, 그리고 18년 연속 두 자릿수 도루라는 꾸준함과 함께 3회의 도루왕이라는 강한 임팩트까지 지녔던 선수. 그래서 '대도(大盜)'라는 별명을 자신의 이름처럼 삼았던 선수이자 '독사'라는 근성이 느껴지는 별명까지 지니고 있었던 선수. 흔치않게 '두 팀의 전설'로 추억되는 선수. 현재 SK와이번스의 코치를 맡고 있는 전준호도, 기억과 기록의 편차가 크게 좁혀져 있는 선수이다.
(와이번스 주루코치 전준호.)
어렸을적, 초등학교 야구부가 없어 중학교로 야구를 하러 갔다는 열정을 가진 열혈야구소년이었던 그는, 일본 프로야구의 전설 장훈을 우상으로 삼으며 야구방망이를 잡았다. 둘째가라면 서러운 구도(球都) 마산의 야구소년은 그렇게 마산동중, 마산고를 거쳐 영남대를 졸업한 그는 2차 2순위로 지역연고 팀인 롯데 자이언츠에 지명되었다. 그리고 91년 데뷔 첫 해부터 주전자리를 꿰차면서 전설의 시작을 알렸다. 그렇게 2년차에 팀의 톱타자로 남두오성(南斗五星)의 일원으로 3할에 맞춘 타율과 33도루를 소총을 넘어서는 '기관포 부대'였던 자이언츠 공격의 물꼬를 텃다. 그렇게 그는 팀의 핵심선수로, 팬들에게 큰 사랑을 받는 선수로 빠른 시간내에 각인되었다. 그리고 그의 열정적이고 근성과 독기가 서려있는 플레이는 '독사'라는 별명으로 돌아왔다.
(2000안타는 그가 친정팀인 자이언츠를 상대로, 사직구장에서 달성했다. 자이언츠 팬들은 진심을 담아 기록을 축하해 주었다.)
93년 75도루로 73도루를 기록한 '바람의 아들' 이종범과 더불어 70도루 시대를 열면서 도루 신기록을 세웠으며(이듬해 이종범이 84개를 기록하며 갱신했다.) 95년에는 프로야구 최초로 200도루를 넘기면서 역대 최고의 구단도루 기록을 세운 기동력의 자이언츠를 이끌며 69개의 도루를 기록하는 등 '뛰는 야구'의 치열함과 즐거움을 보여준 선수였다. 그러나 그는 단지 도루에만 능한 선수가 아니어서 빠른 다리로 중견수를 맡아 넓은 수비범위를 자랑하며 자이언츠 외야에 빈 곳을 허용치 않았으며 팀 배팅에 능한 만능 선수였다. 말 그대로 '타고난 리드오프'였으며 팀의 10년 대계를 책임질만한 인재였다.
하지만 전준호는 자이언츠의 프랜차이즈 스타가 되지 못했다. 97시즌을 앞두고 문동환과 트레이드 되었다. 이 트레이드는 프로야구 30년사에서 가장 이상한 트레이드(사실상 선수 팔아먹기)였다. 이 트레이드는 문동환이라는 에이스가 필요한 자이언츠와 톱타자가 절실한 유니콘스의 나름의 철저한 계산에 의해서 진행되었다. 특히 자이언츠는 김대익 등 젊은 톱타자 유망주들을 믿고 전준호를 내쳤다. 결과적으로 이 트레이드는 유니콘스의 완승으로 판명되었고, 자이언츠는 그 후 지속적인 톱타자 부재에 시달리며 대부분의 시간을 하위권에서 헤맸다.
(유니콘스 입장에서 성공적인 트레이드였다. 그는 유니콘스에서 10년 이상을 톱타자로 활약했다.)
전준호는 트레이드의 충격 때문인지 이적 첫해, 2할 중반으로 타율이 떨어지는 극심한 슬럼프를 경험했다. 하지만 독기로 다시 일어나 부활한 98년, 3할 2푼 1리의 높은 타율에 35도루를 성공하며 팀을 한국시리즈 정상에 올려 놓는다. 이후 꾸준히 팀의 톱타자의 자리를 지키며 3할을 넘나드는 타율과 더불어 두 자릿수 도루를 꼬박꼬박 해내며 경이로운 기록들을 쏟아냈다. 사이클링 히트, 프로통산 최고도루 신기록, 통산 1000득점, 한국시리즈 홈스틸, 프로최초 500도루, 2000경기 출장, 2500루타, 18년 연속 두 자릿수 도루, 2000안타, 100호 3루타, 550도루 등등. 프로통산 첫번째인 기록만 해도 6개. 그야말로 한국야구의 산증인이자 전설이었다.
(치고 나가는 전준호. 그의 일거수 일투족은 기록이었다.)
그는 톱타자로 갖추어야 할 모든 것을 갖추었다. 우선 좌타자라는 타고난 이점. 밀어치고, 당겨치는 것을 자유자재로 하는 타격센스, 역대 최고의 재능이라고 평가되는 번트, 루상에 있을 때에는 상대 배터리와 끊임없이 전개하는 신경전. 그리고 그 신경전의 중심추를 자신에게 가져오는 빠른 발과 센스를 이용한 도루. 특히, 그의 3루 도루는 상대 배터리가 긴장의 끈을 놓지 않게 만들었으며 빠른 발과 타격센스로 만들어낸 수 많은 3루타들(통산 2위인 김응국 선수와 거의 2배 차이가 나는)은 투수를 무너뜨리는 '톱타자'의 자리에 가장 적합한 선수가 전준호라는 것을 사람들에게 인식시키게끔 했다.
(루상의 전준호는 타석의 전준호보다 훨씬 두려운, 프로야구에서 가장 무서운 존재였다.)
더해서 그는 단순히 실력만 뛰어난 선수가 아니었다. 팀의 리더로 인식될만한 선수였고, 젊은 선수들에게 본보기가 될 만한 선수였다. 더불어 자기관리가 철저하고 언제나 노력했던 선수였다. 자신과 같이 뛰었던 동년배들과 후배들이 하나 둘 은퇴를 할 때에도 그는 선수의 자리에서 은퇴하는 이들에게 꽃다발을 전해주었고, 팀이 팔려나가 말도 안되는 연봉이 후려쳐졌을 때에도 실력으로 자신의 가치를 입증해냈다. 분명 '독사'라는 거친 별명은 쉽게 얻어진 것은 아니었고 '대도'라는 야구사에 길이남을 별명은 더더욱 쉽지 않았다.
(불혹이 되기전에 도루왕 한번 더 해보겠다는 그의 꿈은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40세에 18개 도루를 기록하는 기염을 토했다.)
20년에 가까운 선수생활이었지만, 그의 마지막은 아쉽기 그지 없었다. 부상으로 09시즌 대부분을 뛰지 못했기에 주축선수들 대부분 팔려나가는 상황과 겹쳐 쓸쓸히 방출당하고 말았다. 결국 그 시점에서 선수생활을 접은 그는 프로 최초로 팬들이 열어준 감동적인 은퇴식으로 아쉬움을 달래며 와이번스의 주루코치로 다시금 그라운드 위에 서게 되었다. 초보 지도자로서 미숙한 점도 많기에, 2군 강등도 겪었지만, 그가 뛰어난 지도자가 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을 것이라 본다. 쓴맛 단맛을 모두 맛본 선수이기에. 그리고 뛰어난 재능에 만족치 않고 성실함까지 겸비했던 전준호이기에 미국연수를 다녀온 뒤의 그의 모습이 더욱 기대되는 바이다.
(팬들이 열어준 가장 독특한 은퇴식. 현수막의 문구 그대로 끝나지 않는 전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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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의 출처는 네이버 뉴스입니다.

그러나 몇몇 선수들은, 100년이 지나도 기록지 위 상위권에 랭크 되어있을 있을 것이다. 기록이 있으면 기억하기도 싶다. 그렇게 그들의 이름은 미래의 한국프로야구에서도 기억에 깊이 새겨져 있을 것이다. 타격 부문에서 대부분의 통산 1위 기록을 지닌 양준혁이나, 투수 부문에서 대부분의 통산 1위 기록을 지닌 송진우, 100승 200세이브의, 한미일 프로야구를 통틀어서도 흔치 않은 기록을 지니고 있는 노송 김용수. 더불어서 550도루, 그리고 18년 연속 두 자릿수 도루라는 꾸준함과 함께 3회의 도루왕이라는 강한 임팩트까지 지녔던 선수. 그래서 '대도(大盜)'라는 별명을 자신의 이름처럼 삼았던 선수이자 '독사'라는 근성이 느껴지는 별명까지 지니고 있었던 선수. 흔치않게 '두 팀의 전설'로 추억되는 선수. 현재 SK와이번스의 코치를 맡고 있는 전준호도, 기억과 기록의 편차가 크게 좁혀져 있는 선수이다.

어렸을적, 초등학교 야구부가 없어 중학교로 야구를 하러 갔다는 열정을 가진 열혈야구소년이었던 그는, 일본 프로야구의 전설 장훈을 우상으로 삼으며 야구방망이를 잡았다. 둘째가라면 서러운 구도(球都) 마산의 야구소년은 그렇게 마산동중, 마산고를 거쳐 영남대를 졸업한 그는 2차 2순위로 지역연고 팀인 롯데 자이언츠에 지명되었다. 그리고 91년 데뷔 첫 해부터 주전자리를 꿰차면서 전설의 시작을 알렸다. 그렇게 2년차에 팀의 톱타자로 남두오성(南斗五星)의 일원으로 3할에 맞춘 타율과 33도루를 소총을 넘어서는 '기관포 부대'였던 자이언츠 공격의 물꼬를 텃다. 그렇게 그는 팀의 핵심선수로, 팬들에게 큰 사랑을 받는 선수로 빠른 시간내에 각인되었다. 그리고 그의 열정적이고 근성과 독기가 서려있는 플레이는 '독사'라는 별명으로 돌아왔다.

93년 75도루로 73도루를 기록한 '바람의 아들' 이종범과 더불어 70도루 시대를 열면서 도루 신기록을 세웠으며(이듬해 이종범이 84개를 기록하며 갱신했다.) 95년에는 프로야구 최초로 200도루를 넘기면서 역대 최고의 구단도루 기록을 세운 기동력의 자이언츠를 이끌며 69개의 도루를 기록하는 등 '뛰는 야구'의 치열함과 즐거움을 보여준 선수였다. 그러나 그는 단지 도루에만 능한 선수가 아니어서 빠른 다리로 중견수를 맡아 넓은 수비범위를 자랑하며 자이언츠 외야에 빈 곳을 허용치 않았으며 팀 배팅에 능한 만능 선수였다. 말 그대로 '타고난 리드오프'였으며 팀의 10년 대계를 책임질만한 인재였다.
하지만 전준호는 자이언츠의 프랜차이즈 스타가 되지 못했다. 97시즌을 앞두고 문동환과 트레이드 되었다. 이 트레이드는 프로야구 30년사에서 가장 이상한 트레이드(사실상 선수 팔아먹기)였다. 이 트레이드는 문동환이라는 에이스가 필요한 자이언츠와 톱타자가 절실한 유니콘스의 나름의 철저한 계산에 의해서 진행되었다. 특히 자이언츠는 김대익 등 젊은 톱타자 유망주들을 믿고 전준호를 내쳤다. 결과적으로 이 트레이드는 유니콘스의 완승으로 판명되었고, 자이언츠는 그 후 지속적인 톱타자 부재에 시달리며 대부분의 시간을 하위권에서 헤맸다.

전준호는 트레이드의 충격 때문인지 이적 첫해, 2할 중반으로 타율이 떨어지는 극심한 슬럼프를 경험했다. 하지만 독기로 다시 일어나 부활한 98년, 3할 2푼 1리의 높은 타율에 35도루를 성공하며 팀을 한국시리즈 정상에 올려 놓는다. 이후 꾸준히 팀의 톱타자의 자리를 지키며 3할을 넘나드는 타율과 더불어 두 자릿수 도루를 꼬박꼬박 해내며 경이로운 기록들을 쏟아냈다. 사이클링 히트, 프로통산 최고도루 신기록, 통산 1000득점, 한국시리즈 홈스틸, 프로최초 500도루, 2000경기 출장, 2500루타, 18년 연속 두 자릿수 도루, 2000안타, 100호 3루타, 550도루 등등. 프로통산 첫번째인 기록만 해도 6개. 그야말로 한국야구의 산증인이자 전설이었다.

그는 톱타자로 갖추어야 할 모든 것을 갖추었다. 우선 좌타자라는 타고난 이점. 밀어치고, 당겨치는 것을 자유자재로 하는 타격센스, 역대 최고의 재능이라고 평가되는 번트, 루상에 있을 때에는 상대 배터리와 끊임없이 전개하는 신경전. 그리고 그 신경전의 중심추를 자신에게 가져오는 빠른 발과 센스를 이용한 도루. 특히, 그의 3루 도루는 상대 배터리가 긴장의 끈을 놓지 않게 만들었으며 빠른 발과 타격센스로 만들어낸 수 많은 3루타들(통산 2위인 김응국 선수와 거의 2배 차이가 나는)은 투수를 무너뜨리는 '톱타자'의 자리에 가장 적합한 선수가 전준호라는 것을 사람들에게 인식시키게끔 했다.

더해서 그는 단순히 실력만 뛰어난 선수가 아니었다. 팀의 리더로 인식될만한 선수였고, 젊은 선수들에게 본보기가 될 만한 선수였다. 더불어 자기관리가 철저하고 언제나 노력했던 선수였다. 자신과 같이 뛰었던 동년배들과 후배들이 하나 둘 은퇴를 할 때에도 그는 선수의 자리에서 은퇴하는 이들에게 꽃다발을 전해주었고, 팀이 팔려나가 말도 안되는 연봉이 후려쳐졌을 때에도 실력으로 자신의 가치를 입증해냈다. 분명 '독사'라는 거친 별명은 쉽게 얻어진 것은 아니었고 '대도'라는 야구사에 길이남을 별명은 더더욱 쉽지 않았다.

20년에 가까운 선수생활이었지만, 그의 마지막은 아쉽기 그지 없었다. 부상으로 09시즌 대부분을 뛰지 못했기에 주축선수들 대부분 팔려나가는 상황과 겹쳐 쓸쓸히 방출당하고 말았다. 결국 그 시점에서 선수생활을 접은 그는 프로 최초로 팬들이 열어준 감동적인 은퇴식으로 아쉬움을 달래며 와이번스의 주루코치로 다시금 그라운드 위에 서게 되었다. 초보 지도자로서 미숙한 점도 많기에, 2군 강등도 겪었지만, 그가 뛰어난 지도자가 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을 것이라 본다. 쓴맛 단맛을 모두 맛본 선수이기에. 그리고 뛰어난 재능에 만족치 않고 성실함까지 겸비했던 전준호이기에 미국연수를 다녀온 뒤의 그의 모습이 더욱 기대되는 바이다.

*퍼가실때 출처를 밝혀주시는 네티켓을 부탁드립니다.
*사진의 출처는 네이버 뉴스입니다.








